간증

몽달이 생각  |   2008. 3. 13. 05:03

 대치동 학원가의 모 교회에는 큰 현수막이 걸려있다. 현수막 안에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의 사진과 옆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간증] 하나님과 같이 하여 영어를 마스터 한 중학생 김 XX 군"

 역시 대치동이구나 하는 마음과 함께 사람들에게 공부잘하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하는 교회의 따뜻한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 것을 보면서 간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하느님(하나님)과 같이 있기에 안되는 일이 잘 되어서 그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감사함을 돌린다는 의미에도 있겠지만 그를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 바로 간증이 아닐까 하는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려보고 싶다.

 간증이라고 하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어려움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내고 또한 사람들에게 널리 잘 알려진 사람으로 사람들의 부러움이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화상으로 얼굴을 포함하여 온 몸에 화상을 입고도 꿋꿋하게 잘 이겨내는 이지선 양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 뭉쿨하며 그 안에서 따뜻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기도 한다. 바로 그런 것이 간증이라는 생각은 해본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만을 얘기하는 이런 간증으로 사람들은 도대체 그 사이에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잊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대치동 학원가에는 모든 염원이 대학으로 쏠려 있다. 그 졸린 눈을 가지고 학원에서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대학을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인지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모호한 경계를 가지게 된다. 왜 공부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물음보다는 공부는 해야하는 것이고 그 공부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또 다른 도구가 되어버려있고 그 안에서 공부는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점수를 많이 올려주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린 하나의 다른 세상이다. 그런 한복판에 서 있는 교회 역시 세속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보려고 하는 것일까? 영어 공부를 잘하고 점수를 잘 받은 아이의 모습이 있고 많은 학부모들과 아이들과 무척이나 관심을 가지는 표정이었다. 나름 교회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나를 향하는 그 염원을 집중시킨 점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하느님은 존재한다고 그렇게 믿어야 하며 우리는 그저 믿는 것보다는 무엇인가 내 앞에 증거함을 봐야지만 분이 풀리고 믿음이 강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누군가 그런 얘기를 한다. "예수님이 살고 계신 시대에 살아서 그 많은 기적들과 그 많은 행적들과 말씀을 직접 듣는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좋을까."

 나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일이 잘풀리거나 현실에서 행복을 느끼는 순간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소위 "어둔 밤"의 시기에 기도라는 것은 하기조차 힘들고 무엇을 생각해야하는지에 대한 생각의 나태가 찾아올때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그 예수님이 살아계신 시절로 돌아가보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그저 전지전능하고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내 눈에는 그저 좋은 것만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걸어온 그 여정의 순간 순간을 나는 깊이 깨달지 못하고 그저 피상적인 이야기 거리들로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같이 했던 여정은... 그리고 내가 하나의 제자로 같이 했던 여정의 한 자락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전지전능함만이 들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인간적이고 너무도 약해보이고 때로는 그 예수님을 내가 감싸안아주고 싶을만큼 눈물이 가득한 그런 여정이었다. 세상의 갖은 모욕과 핍박과 인간적으로 받기 힘든 고통과 멸시 그리고 곁에서 사랑하던 사람들의 배반과 배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피하고 싶은 것들을 그분은 혼자서 받으셨다. 그리고 그 결과 성경에서는 그래도 하느님과 성령의 내려옴으로 그분의 신성을 표시해 주었지만 그 십자가형이 집행되던 그 언덕에 서 있었다면 난 그분에 대한 한 가닥 희망과 기대도 다 잊어버리고 그저 십자가형에 처해진 죄수로 바라보았을지 모른다.

 그분은 부활하셨고 그 사실을 믿고 그 부활로 이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지금의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런 감동적인 마음의 변화를 가지기는 힘들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입술로는 믿는다고 얘기하지만 그분의 부활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통속에서 피어나는 꽃이었는지에 대해서 잘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분의 부활을 그렇게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는 또다른 기적을 바라고 살아간다. 하느님을 믿어서 우리가 해야할 사명을 잊어버리고 그분이 주실 영광과 혜택만을 생각한다. 그분을 믿으면 우리에게 어떤 할인혜택이 주어지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조금 더 노력해도, 노력을 좀 안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겠지 그렇게 말이다. 그러나 그분이 걸었던 십자가의 길이 있었기에 영광도 있었음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기적안에서 살아간다. 지금 전세계 어디를 가도 마음만 먹는다면 주일에 미사를 드릴 수 있기도 하고 그리고 신앙인으로 내 안에 품고 있는 묵주와 기도서를 통해서 그리고 내 마음속에 있는 마음을 통해서 나는 오늘도 기도를 하고 오늘도 감사를 드린다. 그것이 우리가 보는 가장 큰 기적이 아닐까. 부활을 목격하고 모든 마음이 변해서 죽음까지 불사하면서 순교를 하셨던 사도들, 무엇을 위해 그리 귀중한 목숨을 순교로 바쳐야 했던 우리의 순교 성인들. 머리로만 그분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교회가 있다는 말을 받아들이다가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가슴으로 깨달기 시작했다. 너무도 놀라울 뿐이다. 같은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만난 내 옆에 있는 형재 자매들이 바로 기적이다. 부활이 없었다면 나의 믿음, 너의 믿음, 우리의 믿음이 어찌 가능했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는 하느님만이 가능하게 해주신 바로 기적이고 그 기적의 산물은 바로 우리들 서로 서로이며 우리의 교회이며 그걸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렇게 얘기한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랑이라는 마음은 죄가 없으신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묻히셨던 그분의 부활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사랑에도 의미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은 사랑이며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도 자유롭게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댓가를 치루어야 할 것 같이 행복을 주는 사랑인데도 우리는 너무도 자유롭게 사랑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때로는 우리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많이 겪는다. 그리고 그런 일들에 대해서 감동을 받게 되고 그런 큰 충격이 있어야지만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버리곤 하는 것 같다. 예수님의 기적을 그렇게 수차례 보고도 결국 뿔뿔히 흩어져 버리는 엄선된 제자들, 그중에 이스카리옷 유다는 자신의 인간적 욕심으로 그분을 시험하려고 했다. 얼마나 많은 기적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얼마나 큰 기적으로 우리가 변화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변화란 그분의 부활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시작되어야 한다. 한걸음 한걸음 내가 걷는 이 길이 바로 그분의 부활을 통해서 변화되어 인간의 욕심이 이끄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가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이러한 작은 변화는 쉽게 지치거나 허탈해지지 않는다. 연수를 통해서 나와서 사랑이 충만해지고 영빨이 100%인 것 같은 그 상태에서 얼마나 자신이 보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해답이 쉽게 나올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짜릿한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변화를 이끌고 그 변화의 길이 어느 방향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바로 말씀이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 (시편 119,105) 

 우리의 삶에서 간증이, 짜릿한 기적이 내 삶의 등불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그런 경험이 나쁘다고만 할 수 없지만 경험하였다면 그만큼 말씀에 기대어 그것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신앙인에게 매일은 기도이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도 살아서 오늘 하루를 바라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하며 그분의 존재를 같이 호흡하면서 살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야할 것이다. 감사가 없는 삶은 빛이 없는 어둠만이 존재하는 삶이다. 그리고 그분에게 우리가 바라는 것을 청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항상 의논하는 삶속에서 내가 구해내지 못할 것 같은 지혜도 얻어내는 기쁨을 누리게될 것이다. 청원이 없는 삶은 싱거운 삶이다. 삶의 짭짤함으로 즐겁고 행복한 삶을 이끌어낼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매일은 감사와 청원으로 이루어지며 내 자신에게 빛과 소금이 되고 나아가 그 행복한 삶의 증거자로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빛과 소금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기도이다. 그래서 기도는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수 있는 가장 큰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의 기도를 함은 결코 말씀을 벗어나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자신의 욕심만으로 밝히며 청원하는 것이나 자신의 욕심이 이루어짐에 감사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무엇보다 의탁하는 기도이다. 의탁이란 자신에게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어 그저 주, 당신에게만 의지할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일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채워주는 주님이나 자신의 욕심을 갈구하는 주님의 모습으로 우리가 모실 것인지 아니면 그저 당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맡기는 간절함의 기도를 해보면 어떨까.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마르 14,36)  

사용자 삽입 이미지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 - 한국 수묵화

 예수님이라도 인간이시기에 자신의 험한 운명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은 하느님에게 의탁하고 그분의 뜻을 온전히 받을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 결과에 대해서 우리의 잘난 이성으로 판단하고 미리 결정하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요즘은 성경의 구절을 보기만 하여도 왠지 눈물이 난다. 성글 성글 맺히는 그 눈물을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무엇인가 바꾸기엔 너무 미약하고 무엇을 하기엔 너무 보잘 것없는 내 눈속에 맺힌 눈물을 보면 오히려 용기가 나기 때문이다. 그 눈물로 비록 영어를 원어민처럼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야하는 길 한 발자욱을 말씀으로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그 마음으로도 기적은 충분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성령으로 내 혀를 영어로 원어민처럼 감싸주지 않으셨지만 그보다 더 따뜻한 디딤돌을 보여주셨기에 난 오늘도 내 자신이 행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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